[PEDIEN] 일흔다섯 살 말기 암 환자가 있다고 하자.

몸은 더 버티기 어렵고, 본인도 무의미한 치료는 그만 받고 싶다.

그런데 지금 한국 제도에서는 그 바람만으로 연명의료를 멈출 수 없다.

담당의사와 전문의 한 명, 모두 두 명이 '임종과정에 들어섰다'고 판단해야 비로소 유보·중단이 가능하다.

임종과정은 회복 가능성이 없고 증상이 급속히 나빠져 사망이 임박한 상태, 통상 수일 안쪽을 가리킨다.

그 며칠 전인 '말기'까지는 제도의 대상이 아니다.

또 한 사람을 떠올려 보자.

평생을 함께 산 친구나 동반자는 있는데 법적 가족은 없는 사람이다.

그가 의식을 잃고 사전에 남긴 문서도 없다면, 현행법상 그를 가장 잘 아는 그 동반자는 연명의료를 대신 결정할 자격이 없다.

결정은 '가족'의 몫으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와 국무총리 소속 의료혁신위원회가 11월 7~8일 서울대 시흥캠퍼스에서 연 '제2차 의료혁신 시민패널 공론화 숙의토론회'는 바로 이 두 지점을 다뤘다.

성별·연령·지역을 고려해 모은 시민패널 약 300명이 1박 2일 동안 연명의료 유보·중단 '시점', 대리결정 '주체', 생애 말 의료·돌봄 '지원'이라는 세 의제를 놓고 토의했다.

결과는 11월 말 의료혁신위에 보고되고,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산하 연명의료결정제도 개선 특별위원회 논의에 쓰인다.

한국이 지금 어디에 서 있고, 다른 나라는 어떤 토대 위에서 같은 문제를 풀었는지 나란히 놓고 보면 쟁점이 또렷해진다.

한국의 기준점은 '임종과정', 통상 수일 안쪽이다

한국의 연명의료결정제도는 2016년 법으로 만들어져 2018년 2월부터 시행됐다.

핵심 절차는 두 가지 확인 위에 선다.

환자가 임종과정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의사 2인), 그리고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 본인의 뜻 확인이다.

본인 뜻은 19세 이상이 미리 작성해 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말기·임종기 환자를 위해 담당의사가 작성하는 연명의료계획서로 확인한다.

둘 다 없고 환자가 표현도 할 수 없으면 가족 2인 이상의 일치하는 진술로, 그마저 불가능하면 가족 전원 합의로 결정한다.

제도는 빠르게 자리 잡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누적 등록은 2025년 말 약 320만 건(320만 1,958건)에 이르렀다(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2025 연명의료결정제도 연보').

연명의료 유보·중단 이행은 제도 시행 이후 누적 50만여 건을 넘어섰고, 2025년 이행 가운데 환자 본인이 미리 뜻을 밝혀 둔 경우의 비율은 2018년 32.5%에서 2025년 52.2%로 올랐다.

등록의 규모만 보면 한국은 아시아에서 드문 성취를 이뤘다.

다만 그 많은 의향서가 실제로 효력을 내는 지점은 '임종과정'이라는 좁은 창에 묶여 있다.

이번 공론화의 첫째 날 의제가 바로 그 창을 '말기'까지 넓힐 것인가였다.

대만은 치매 말기까지 열었지만, 문턱이 높았다

아시아에서 이 창을 가장 넓게 연 곳은 대만이다. 2019년 1월 시행된 환자자기결정권법(병인자주권리법)은 아시아 최초로 환자의 사전결정을 전면 보장했다.

적용 대상이 임종기에 그치지 않는다.

말기 질환, 돌이킬 수 없는 혼수, 영구적 식물인간 상태, 중증 치매, 그리고 당국이 고시하는 그 밖의 견디기 어려운 상태까지 다섯 가지 임상 상황에서 미리 서명해 둔 사전결정으로 연명의료와 인공 영양·수분 공급을 멈출 수 있다.

한국이 지금 '말기까지 넓힐지'를 토론하는 선을, 대만은 치매 말기까지 밀어 두었다.

대신 대만의 사전결정은 토대가 다르다.

반드시 사전돌봄계획(ACP) 상담을 거쳐야 하고, 그 상담은 유료다. 60분에 약 3,000대만달러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그 문턱 탓에 2025년 초까지 사전결정에 서명한 사람은 10만 명 안팎, 성인 인구의 1%에도 못 미친다.

대만은 2024년 7월부터 65세 이상 중증·다중만성질환자 등의 상담비를 건강보험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범위를 넓게 열되 접근 문턱을 높게 둔 대만과, 효력 범위는 좁지만 작성은 쉽고 무료라 약 320만 명이 등록한 한국은 정반대의 선택을 한 셈이다.

독일·영국은 '병의 단계'가 아니라 '내 결정'에서 출발한다

유럽의 두 나라는 애초에 시점을 따지는 방식이 아니다.

독일의 환자사전의향서(Patientenverfügung)는 2023년 1월 후견법 개정으로 민법 제1827조에 자리 잡았는데, 조문은 이 문서가 '질병의 종류와 단계, 중한 정도와 무관하게' 적용된다고 못 박고 있다.

임종이 임박했는지를 조건으로 걸지 않는다는 뜻이다.

작성은 성년자가 서면으로 서명하면 되고 공증인이나 의사, 증인이 필요 없다.

잉글랜드·웨일스의 토대는 2005년 정신능력법(Mental Capacity Act)이다.

사전치료거부(ADRT)는 법적 구속력을 가지며, 환자가 판단 능력을 잃는 어느 시점에나 작동한다.

다만 생명유지치료를 거부하려면 서면으로 작성하고 서명과 증인을 갖춰야 한다는 요건을 둔다.

보호법원도 유효하고 적용 가능한 사전거부는 뒤집지 못한다.

두 나라 모두 출발점이 '병이 얼마나 급박한가'가 아니라 '본인이 능력 있을 때 무엇을 정해 두었는가'다.

그 토대 위에서는 시점을 따로 규정할 이유가 크지 않다.

대리인을 '가족 밖'에서 고르는 나라들

둘째 날 의제였던 대리결정 주체에서 차이는 더 선명하다.

독일에는 사전배려위임장(Vorsorgevollmacht·민법 제1820조)이 있어, 본인이 신뢰하는 사람을 의료 결정 대리인으로 세울 수 있다.

가족일 필요가 없다.

생명에 위험이 따르는 조치에 동의할 권한을 주려면 서면에 그 내용을 명시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영국에는 건강·복지에 관한 지속적 위임장(LPA)이 있어, 지정받은 대리인이 생명유지치료 동의를 거부하는 권한까지 가질 수 있다.

프랑스에는 신뢰인(personne de confiance), 대만에는 의료위임대리인 제도가 있다.

이들 제도의 공통 토대는 '본인이 누군가에게 의료 결정을 위임하는 법적 장치'다.

한국에는 바로 그 장치가 없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는 내 뜻을 적을 수는 있어도, 내가 의식을 잃었을 때 '이 사람이 나를 대신해 결정하게 하라'고 특정인을 지정하는 칸이 없다.

결정은 가족이라는 단위로 돌아간다.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늘고 혈연 아닌 동반 관계가 흔해지는 사회에서, 대리결정 주체를 가족 밖으로 넓히자는 논의는 결국 '위임이라는 토대를 새로 깔 것인가'라는 질문과 맞닿는다.

프랑스는 멈추는 데서 한 걸음 더 갔고, 일본은 법 없이 지침으로 간다

프랑스는 2016년 클레스-레오네티법으로 사전의향서(directives anticipées)에 구속력을 주고 3년이던 유효기간을 없앴다.

의사는 원칙적으로 이 뜻에 따라야 한다.

여기에 생명 예후가 단기인 환자에게 사망에 이를 때까지 유지하는 '깊고 지속적인 진정'까지 제도화했다.

다만 조력사망(aide à mourir)은 다른 이야기다.

상원이 세 차례 반대했지만 하원이 최종 결정권을 행사해 2026년 7월 15일 조력사망 법안을 최종 가결(찬성 291·반대 241)했다.

다만 총리가 헌법위원회에 합헌성 심사를 요청했고 시행령 절차도 남아 있어, 2026년 11월 현재 아직 공포·시행되지는 않았다.

한국의 이번 공론화는 조력사망이 아니라 연명의료를 '언제, 누가' 멈출지를 다룬다는 점을 혼동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반대편에 일본이 있다.

일본은 사전의향서에 관한 법률 자체가 없다.

후생노동성이 2007년 만들어 2018년 개정한 '인생 최종단계 의료·케어 결정과정 지침'에 따라, 환자와 의료팀, 환자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거듭 상의해 결정한다.

가족 중심이라는 점은 한국과 닮았지만 법적 근거와 전국 등록 체계가 없다.

한국은 법을 만들었고 사전의향서를 등록·관리하는 국가기관을 두어 약 320만 건을 쌓았다.

이 지점에서는 한국이 일본보다 한발 앞서 있다.

넓히기 전에 물어야 할 것

해외 사례를 나란히 놓으면 한국 제도의 모양이 분명해진다.

독일·영국·대만·프랑스는 '단계를 따지지 않는 사전결정'과 '가족 밖 대리인 지정'이라는 두 토대 위에 서 있다.

한국은 그 두 토대가 아직 얇은 상태에서 '임종과정에서 말기로', '가족에서 가족 밖으로'라는 확장을 논의하고 있다.

범위를 넓히면 대만처럼 상담·판정 절차가 무거워지고, 대리인을 넓히면 그 권한을 검증할 장치가 필요해진다.

어느 쪽도 숫자나 틀만 들여온다고 저절로 작동하지 않는다.

시민패널의 토의 결과는 11월 말 의료혁신위원회에 보고된다.

그 결과가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연명의료결정제도 개선 특별위원회로 넘어가면, 정부는 답해야 한다.

중단 가능 시점을 말기까지 넓힌다면 '말기'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판정할 것인가.

가족 밖으로 대리인을 연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지정하고 남용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토대에 대한 답이 먼저 나와야 할 차례다.

취재에 참고한 자료

보건복지부·의료혁신위원회 보도자료 '생애 말 의료·돌봄 공론화 착수'(2026년 11월 6일 배포, 7일 조간) 및 붙임 '연명의료결정제도 개요'에서 한국 제도의 절차와 의제를 확인했다.

한국 통계는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중앙호스피스센터가 2026년 11월 발간한 '2025 연명의료결정제도 연보'·호스피스 연례보고서(사전의향서 누적 320만 건, 유보·중단 이행 누적 50만여 건, 2025년 본인 의사 확인 비율 52.2%)에서 옮겼다.

대만은 법무부 법령데이터베이스의 환자자기결정권법 원문과 대만안녕조고기금회·타이베이타임스 보도로 5개 임상 상황과 사전결정 서명 규모·상담비를 확인했다.

독일은 민법 제1827조·제1820조 조문(dejure.org), 영국은 2005년 정신능력법과 공공기관 안내, 프랑스는 2016년 클레스-레오네티법 해설과 의회 입법정보(조력사망 법안은 2026년 7월 하원 최종 가결·미공포), 일본은 후생노동성 '인생 최종단계 의료·케어 결정과정 지침' 영문본을 참고했다.

나라마다 사전의향서의 대상 범위와 작성 절차, 가족·대리인의 법적 지위가 달라 등록 건수나 비율을 같은 잣대로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 점을 감안해 수치는 제도의 맥락과 함께 읽어야 한다.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