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DIEN] 들판에 놓인 컨테이너 한 동을 떠올려 보자.
사람이 들어갈 통로가 아예 없는, 배터리 랙으로 꽉 찬 밀폐된 금속 상자다.
그 어두운 내부에 CCTV 한 대가 배터리를 향해 달려 있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상자 안에서, 카메라는 무엇을 보려고 켜져 있나.
배터리의 전압·전류·온도는 이미 배터리관리시스템(BMS)이 밀리초 단위로 읽고 있는데도 그렇다.
11월 2일 국무조정실 산하 규제합리화위원회 민생분과가 내놓은 이차전지 규제합리화 방안에는 이 장면을 지우는 조항이 들어 있다.
사람이 통행할 수 없는 컨테이너형 ESS(에너지저장장치)에 BMS 등 '카메라보다 효과적인' 배터리 관리 기술이 적용돼 있으면, 내부 CCTV 설치 의무를 빼주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연말까지 관련 위원회 심의를 거쳐 2027년 한국전기설비규정(KEC·기후부 고시)을 고치기로 했다.
이번에 확정된 ESS·재활용 분야 과제는 12개. 8월에 먼저 발표한 6개를 합치면 18개다.
배터리와 전력변환장치(PCS)를 한 컨테이너에 함께 넣는 설치, 폐수배출시설 변경신고 면제 같은 항목이 함께 들어갔다.
그런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해외에선 이미 이렇게 한다'는 업계의 호소에서 출발한다.
보도자료 스스로 "해외는 전력변환장치 등 전기설비를 배터리와 일체화한 제품이 설치되고 있지만 국내는…"이라고 적었다.
그렇다면 그 해외의 규칙은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나.

사람이 못 들어가는 상자 속 카메라를 지운다
현행 규정은 모든 컨테이너형 ESS 내부에 CCTV를 달도록 한다.
처음 이 규칙이 생겼을 때는 이유가 분명했다.
사람이 걸어 들어가는 '워크인' 방식의 ESS실에서, 관리자가 화면으로 연기나 불꽃을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
문제는 지금 현장에 늘어나는 상자가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밀폐형이라는 점이다.
내부는 캄캄하고, 불이 나면 카메라가 가장 먼저 녹는다.
정부와 업계가 "BMS가 더 효과적"이라고 말하는 배경이다.
해외 주요 기준에서 '컨테이너 안에 카메라를 달라'는 의무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배터리가 스스로 이상을 감지해 보고하도록 요구한다.
감시의 주어가 '사람의 눈'이 아니라 '시스템'인 셈이다.
미국은 카메라가 아니라 '시험 성적서'를 본다
미국의 ESS 설치는 소방기준 NFPA 855(2023년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 기준은 개별 ESS 유닛을 서로 3피트(0.9m) 떨어뜨리라고 정하되, 더 좁혀도 되는지는 'UL 9540A'라는 시험으로 판단하게 한다.
UL 9540A는 배터리 한 셀에서 시작된 열폭주 불길이 옆 모듈·유닛으로 번지는지를 대형 화재시험으로 측정하는 방법이다.
제조사가 이 성적서를 관할 소방당국(AHJ)에 제출하면, 당국이 이격거리를 줄여도 되는지 사안별로 승인한다.
폭발을 막는 방식도 카메라와 거리가 멀다.
NFPA 855는 NFPA 69에 따른 폭발 제어, 즉 가연성 가스 농도를 폭발하한의 25% 아래로 유지하는 가스검지·환기 설비를 요구한다.
배터리가 내뿜는 가스를 먼저 감지해 환기로 빼내는 쪽이다. 2026년판에선 단순 폭압 배출(NFPA 68)만으로는 1차 대책으로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더 조인다.
요지는 분명하다.
카메라로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가스와 온도를 읽어 스스로 조치하도록 설계하라는 것이다.
이 방식이 서 있는 토대는 두 가지다.
하나는 UL 9540A라는 표준 화재시험과 그 데이터를 쌓아 온 시험 인프라, 다른 하나는 제출된 성적서를 보고 현장마다 달리 판단하는 관할 소방당국의 재량이다.
숫자를 법에 못 박는 대신, 시험으로 증명하고 당국이 받아들이는 구조다.
일본은 'kWh'로 줄을 세우고 소방서가 받는다
일본은 2023년 소방법 관련 기준을 고쳐 축전지 설비의 규제 단위를 'Ah·셀'에서 'kWh'로 바꿨다. 2024년 1월 1일부터 시행 중이다.
용량 10kWh 이하는 규제 대상에서 빠지고, 10~20kWh는 정해진 기준을 지키면 되며, 20kWh를 넘으면 소방서에 신고하고 점검을 받아야 한다.
제품 자체는 JIS(일본산업규격) 적합을 따진다.
옥외에 둘 때는 건축물에서 3m 이상 떨어뜨리는 게 원칙이다.
다만 연소 확대를 막는 구조를 갖춘 '큐비클식'이면 그 거리를 면제한다.
일본의 토대는 전국을 하나로 묶는 소방법 체계와, 신고·점검을 실제로 받아 주는 시정촌 소방서, 그리고 합의로 만든 JIS 규격이다.
카메라를 달라는 조항은 여기에도 없다.
옥외 이격은 한·미·일 모두 약 3m, 차이는 '풀어 줄 수 있느냐'다

이격거리 숫자만 떼어 보면 한국이 유별나게 빡빡한 건 아니다.
옥외 ESS를 건물·가연물에서 떨어뜨리는 거리로 보면 한국은 3m, 일본도 3m, 미국도 10피트(약 3m)로 세 나라가 엇비슷하다.
차이는 숫자가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느냐'에 있다.
미국의 10피트는 UL 9540A 시험으로 안전을 증명하거나 방화벽을 세우면 3피트(0.9m)까지 줄일 수 있고, 일본의 3m도 큐비클식이면 면제된다.
한국의 3m는 기술기준에 고정된 값이다.
바꿔 말하면 해외의 규칙은 '시험하면 풀어 준다'를 전제로 숫자를 적어 두고, 한국은 '일단 모두에게 똑같이'를 전제로 숫자를 적어 왔다.
이번 CCTV·PCS 완화가 건드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사람이 못 들어가고 BMS를 갖추면'이라는 조건을 달아, 처음으로 획일 규칙에 예외의 문을 내는 셈이다.
한국의 규칙은 '28건의 화재' 위에 서 있다
왜 한국만 카메라까지 달게 했나.
토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2017년 8월부터 2019년까지 잇따른 ESS 화재 28건이 나온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ESS를 깔던 나라에서 불이 연쇄로 났고, 신뢰가 무너졌다. 2019년 6월 산업통상자원부는 원인조사 결과와 함께 안전강화 대책을 내놨다.
옥내 설치 용량을 600kWh로 제한하고, 옥외는 별도 전용건물에 두며, 이상 징후가 잡히면 관리자에게 즉시 통보하고 비상 정지하도록 했다.
그해 말에는 잠금장치와 불연재까지 의무가 됐다.
급박한 상황에서 한국이 고른 길은 시험과 당국 재량이 아니라, 모두에게 적용되는 숫자와 장치였다.
CCTV는 그중에서도 눈에 보이고 값싼 감시 수단이었다.
그 선택은 빠르고 균일한 안전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
다만 7년이 지나 상자는 사람이 못 들어가는 밀폐형으로 바뀌었고, BMS는 카메라가 못 보는 셀 단위 이상까지 읽는다.
그 사이 규칙만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번 완화를 '해외를 베꼈다'고 부르긴 어렵다.
오히려 한국은 뒤늦게, 그러나 자기 사정에 맞춰 성능 기반으로 한 걸음 옮기는 중이다.
카메라를 떼는 대신 'BMS 입증'을 조건으로 건 것은, 미국의 시험·당국 재량 구조와 닮은 방향이다.
문제는 한국에 그 토대—독립적인 화재시험 데이터와, 성적서를 사안별로 판단해 줄 당국의 재량·책임 구조—가 미국·일본만큼 갖춰져 있느냐다.
남은 건 2027년 고시 문안이다
정부 일정은 이렇다.
CCTV 완화는 연말까지 관련 위원회 심의를 거쳐 2027년 KEC 개정으로 확정된다.
배터리와 PCS를 한 컨테이너에 넣는 방안은 전기안전연구원의 R&D가 2028년까지 이어진 뒤 안전성 입증을 조건으로 추진된다.
재활용 분야의 통합환경관리 기준 완화는 2027년 하위법령 개정이 목표다.
박용진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은 "규제의 본래 목적을 지키면서 기업의 혁신과 새로운 시장 진출을 뒷받침하는 데 의미가 있다"며 "현장의 실질적 부담 완화로 이어지도록 이행 상황도 꼼꼼히 점검하겠다"고 했다.
남는 질문은 카메라를 뗀 자리를 BMS가 메우는지 누가, 어떤 기준으로 확인하느냐다.
미국이 시험 성적서와 소방당국으로 답한 그 자리를, 한국은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2027년 고시 문안이 그 답을 담게 된다.
취재에 참고한 자료
이 기사는 다음 자료를 확인해 썼다.
한국 쪽 수치는 국무조정실 '이차전지 산업 규제합리화 방안' 보도자료(2026년 11월 2일 배포)에서 옮겼다.
배경이 된 2019년 기준은 산업통상자원부 'ESS 사고원인 조사 결과 및 안전강화 대책'(2019년 6월 11일)과 한국전기설비규정(KEC)을 참고했다.
미국은 미국화재예방협회(NFPA) 855(2023년판)와 UL 9540A 화재전파 시험방법, 일본은 총무성 소방청(FDMA)의 축전지 설비 소방법 개정(2024년 1월 1일 시행)과 일본전기공업회(JEMA) 해설을 확인했다.
다만 나라마다 규제 단위(셀·유닛·kWh)와 이격 대상(가연물·건축물·노출물)이 달라 숫자를 한 줄에 세워 비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표의 '—'는 같은 형태의 규정이 없거나 확인하지 못한 경우다.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