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DIEN] 서울 은평구 불광동 329-32번지.

불광역에서 멀지 않은 저층 주거지다.

땅은 4만9천㎡쯤 되고, 오래전부터 재개발 얘기가 돌았지만 민간만으로는 좀처럼 첫 삽을 못 떴다고 하자.

이런 땅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사업시행자로 들어왔다.

지난해 11월 복합지구로 지정됐고, 1,700여 호가 들어설 계획이다.

10월 30일 한성숙 국무총리가 이곳을 찾았다. 8·13 주택 신속공급 대책에 따른 여덟 번째 현장점검이다.

정부가 붙인 이름은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

민간 정비사업만으로는 개발이 어려운 노후 도심에서 공공이 주도해 용적률을 더 주고 절차를 줄여, 집을 빨리 공급한다는 사업이다.

지금 전국 47곳 약 8만5천 호가 추진 중이고, 서울에 11곳 1만8천 호가 더 얹혔다.

불광동이 눈길을 끈 건 '설계·시공자 통합공모'가 처음 적용되는 곳이어서다.

설계자와 시공자를 따로 뽑지 않고 한 번에 묶어 뽑는다.

사업기간을 줄이고 민간의 설계·시공 역량을 함께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통합공모는 10월 23일 시작됐고, 정부와 LH는 내년 1월까지 민간사업자를 정해 2029년 하반기에 착공하겠다고 했다.

한 총리는 "절차를 단축한 만큼 실제 착공과 입주 단축으로 이어져야 국민이 체감한다"고 했다.

공공이 노후 도심을 재개발한다는 발상은 한국이 처음 꺼낸 게 아니다.

비슷한 제도가 다른 나라에도 있다.

다만 그 나라들의 규칙은 꽤 오래된 토대 위에 서 있다.

일본은 '권리변환'이라는 오래된 장치 위에서 재개발한다

일본의 시가지재개발사업(市街地再開発事業)은 1969년 제정된 도시재개발법에 뿌리를 둔다.

핵심은 권리변환(権利変換)이다.

낡은 건물과 땅을 가진 사람의 권리를, 새로 짓는 재개발 빌딩의 바닥 면적(床)에 대한 권리로 원칙적으로 '등가'로 바꿔준다.

고밀로 더 지어 남는 바닥, 이른바 보류床을 팔아 사업비를 댄다.

용적률은 그 지역을 고도이용지구 등으로 지정해 평소보다 크게 풀어준다.

사업을 끄는 손도 한국과 다르다.

권리자들이 모인 조합이 끌고 가는 경우가 많고, 공적 기구인 도시재생기구(UR)가 참여해 돕는다.

공공이 '명령'하는 구조라기보다, 권리를 床으로 갈아끼우는 법적 장치가 사업을 떠받친다.

그 장치가 60년 가까이 쌓였다.

대신 빠르지 않다.

대표적인 도심 재개발도 10년 안팎, 큰 지구는 도시계획 결정부터 완료·청산까지 20년을 넘기기도 한다.

독일은 같은 일에 '15년'이라는 기한을 법에 적어뒀다

독일에는 도시정비사업(städtebauliche Sanierung)이 있다.

기초지자체인 게마인데가 낙후 구역을 '정비구역(Sanierungsgebiet)'으로 조례를 통해 정하고, 정비수탁자(Sanierungsträger)에게 실무를 맡긴다.

뿌리는 1971년 도시건설촉진법이고, 지금은 건설법전(BauGB) 제136조 이하에 들어가 있다.

눈에 띄는 건 기한이다. 2007년부터 독일 건설법전은 정비사업을 '15년을 넘기지 않도록' 하고, 조례를 정할 때 그 기간을 함께 못 박게 했다(제142조).

못 끝내면 의결로 연장한다.

공공이 주도하되, 그 공공은 중앙이 아니라 동네를 쥔 기초지자체다.

그리고 애초에 '15년짜리 일'로 설계돼 있다.

한국이 앞세운 '속도'와는 출발선이 다르다.

프랑스 재생의 돈은 국가 예산이 아니라 '고용주 부담금'에서 나온다

프랑스는 2003년 이른바 보를로법으로 도시재생청(ANRU)을 세웠다. 2014년 시작한 신(新)국가도시재생프로그램(NPNRU)은 전국 448개 우선지구를 손본다.

규모는 처음 50억 유로에서 지금 약 140억 유로로 커졌다.

재원 구성이 한국과 가장 다른 지점이다.

국가가 직접 대는 몫은 12억 유로 남짓이고, 중심은 고용주들이 내는 주택부담금, 이른바 '1% logement'을 모은 악시옹 로즈망(Action Logement)이 약 80억 유로를 댄다.

이 부담금 제도는 195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업을 끌고 가는 '프로젝트 담당자'도 시장(市長), 곧 지자체다.

올해 국가 예산에서 ANRU에 배정한 현금은 1억1,600만 유로로 지난해 5천만 유로의 두 배가 넘지만, 그조차 프로그램 전체로 보면 작은 몫이다.

사업이 늦어지자 올해 예산법은 약정 기한을 2027년 말로 미뤘고, 2026~2040년의 3차 프로그램(50억 유로) 얘기가 나오지만 아직 결정은 없다.

한국이 내건 건 '속도'인데, 그 속도는 어디까지를 잰 것인가

한국 제도의 전면에는 속도가 있다.

용적률은 올해 4월 시행령 개정으로 역세권·저층주거 유형에서 기준의 1.2배에서 1.4배까지 풀렸다(3년 한시).

지구 지정과 지구계획을 한 번에 처리하는 통합승인 대상도 100만㎡에서 330만㎡로 넓어졌다.

불광동에 처음 적용한 통합공모는 설계와 시공을 묶어 발주 단계를 줄인다.

설계·인허가를 병렬로 돌린다는 점에서, 이건 다른 나라에 없는 한국식 가속 장치이고 실제로 앞단을 당길 수 있다.

문제는 숫자가 재는 구간이다.

불광동은 지난해 11월 지정에서 2029년 하반기 착공까지 약 4년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이 4년은 '착공까지'다.

독일이 법에 적은 15년은 '완료까지'이고, 일본의 10~20년도 완료·청산까지다.

같은 자를 댄 게 아니다.

입주까지의 시간은 아직 숫자로 나와 있지 않다.

총리가 "착공과 입주 단축으로 이어져야 체감한다"고 한 말도 거기에 걸려 있다.

추진력은 한국이 세지만, 돈의 토대는 얇다

한국만의 강점도 분명하다.

다른 나라는 동네를 쥔 지자체(독일·프랑스)나 권리자 조합(일본)이 사업을 끌고, 중앙은 돈과 틀만 댄다.

한국은 중앙 공기업인 LH가 직접 시행자로 들어가 밀어붙인다.

민간이 멈춘 곳을 공공이 떠안는 추진력은 세다.

하지만 돈의 토대는 다르다.

프랑스엔 고용주 부담금이라는 전용 지갑이 70년 넘게 있다.

한국의 도심복합사업은 용적률을 풀어 더 지은 물량을 분양해 사업비를 메운다.

집값과 분양시장이 흔들리면 사업성도 같이 흔들린다.

실제로 정부는 올해 사업성이 떨어지자 용적률을 1.4배로 더 풀고 공원·녹지 의무 면적 기준도 완화했다.

토대가 시장에 민감하다는 뜻이다.

여기에 고밀 아파트 선호, 좁은 생활권, 높은 토지 사유 비중 같은 한국의 조건이 겹친다.

해외의 틀을 가져오더라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굴러가지는 않는다.

남은 일정은 분명하다.

불광동은 내년 1월까지 민간사업자를 뽑고, 2029년 하반기 착공을 겨눈다.

용적률 1.4배 특례는 3년짜리다.

전국 47곳과 서울 11곳이 같은 길을 간다.

정부가 답해야 할 질문은 둘로 좁혀진다.

착공이 아니라 입주까지 걸리는 시간을, 외국 제도와 같은 자로 재서 내놓을 수 있는가.

그리고 분양시장이 식었을 때도 이 사업을 떠받칠 돈이 어디서 나오는가.

취재에 참고한 자료

일본은 국토교통성(MLIT)의 '시가지재개발사업' 안내와 법령 포털 'e-Laws'의 도시재개발법(1969년 제정)으로 권리변환·용적률 완화와 제정 연도를 확인했다.

독일은 건설법전(BauGB) 제136·142조 조문과 1971년 도시건설촉진법 관련 자료로 정비구역·15년 기한·제도의 뿌리를 확인했다.

프랑스는 ANRU 소개 자료와 지방자치단체 포털(collectivites-locales.gouv.fr), 상원(Sénat)의 2026년 NPNRU 예산 심사 자료로 보를로법·프로그램 규모·악시옹 로즈망·2026년 예산을 확인했다.

한국 수치는 10월 30일 국무조정실 보도자료와 2026년 4월 공공주택 특별법 시행령 개정 보도에서 옮겼다.

다만 '사업 기간'은 나라마다 재는 구간이 달라(한국은 착공까지, 독일·일본은 완료까지) 단순 비교에는 한계가 있다.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