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DIEN] 한국 AI 기초연구 생산성은 지금 세계 어디쯤 서 있나.

본지가 올해 열린 ICLR·NeurIPS 양대 학회의 논문 채택 통계와 스탠퍼드 AI 인덱스 국가별 지표, 그리고 국산 벤치마크 생태계 자료를 교차 분석한 결과, 한국은 '모델을 만드는 나라(모델 빌더)'로는 빠르게 올라섰지만 '기초연구를 생산하는 나라(연구 생산국)'로서의 위치는 여전히 세계 5위권 언저리에 머문 것으로 나타났다.

투입하는 돈의 규모와 실제로 쏟아지는 최상위 연구의 양 사이에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모델을 찍어내는 속도는 세계적인데 그 모델의 토대가 되는 원천 아이디어를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비율은 아직 그만큼 따라오지 못했다.

한국 AI 기초연구 생산성,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숫자부터 펼쳐 보자.

기계학습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양대 학회로 꼽히는 ICLR과 NeurIPS의 올해 성적표를 보면 전체 판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NeurIPS 2025는 2만1575편의 유효 투고 가운데 5290편을 받아들여 채택률 24.5%를 기록했고, ICLR 2025는 1만1565편 중 3710편을 통과시켜 32.1%의 채택률을 보였다.

문턱은 해마다 높아지고 투고는 폭증하는 중이다.

정작 중요한 물음은 '누가' 그 좁은 자리를 채웠느냐다.

저자의 소속 국가를 집계한 공개 통계를 보면, ICLR 2025 채택 논문의 절반이 넘는 51% 안팎이 중국·홍콩 소속 연구자가 참여한 논문이었고, 미국이 32% 안팎으로 그 뒤를 이었다.

두 나라가 사실상 학회의 8할을 가져간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쯤일까.

저자 수 기준으로 보면 ICLR 2025에 이름을 올린 한국 소속 연구자는 1790명 안팎으로 추정되는데, 중국(약 1만8900명)·미국(약 1만8800명)과는 자릿수 자체가 다르지만 영국(약 2170명)에 이어 세계 4위권에 해당한다.

작은 나라치고는 선전한 성적이다.

스탠퍼드 AI 인덱스의 집계도 비슷한 그림을 그린다.

한국의 AI 학회 논문 발표량은 연 4200편 안팎으로 세계 5위, 학술지 논문은 1만4500편 안팎으로 7위 수준으로 집계된다.

다만 1위 중국의 학회 논문(약 2만6000편)과 비교하면 6분의 1에도 못 미치고, 미국과도 큰 격차가 있다.

인구 대비로 환산한 특허 밀도에서는 한국이 세계 선두권이라는 평가가 꾸준히 나오지만, 그 강점은 '응용·상용화'에 쏠려 있다는 점을 함께 읽어야 한다.

흐름을 길게 놓고 보면 변화는 더 또렷하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미국이 압도하던 톱티어 학회는 지난 2~3년 사이 중국의 물량 공세로 무게중심이 빠르게 이동했다.

변화 전에는 미국 단독 우위였다면, 변화 후 지금은 중국·홍콩이 채택 논문의 절반을 넘기며 미국을 추월한 구도로 바뀌었다.

이 거대한 재편 속에서 한국의 상대적 지분은 늘지도 줄지도 않은 채 5위권에 멈춰 있다.

판 자체가 커지는 동안 제자리걸음을 했다는 것은, 절대량은 늘었어도 점유율은 오히려 희석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와 견주면 한국의 위치가 더 선명해진다.

일본은 오랜 기초과학 전통에도 불구하고 최근 학회 채택 순위에서 한국과 엎치락뒤치락하는 수준으로, 두 나라 모두 '중견 연구국'의 천장에 부딪친 양상이다.

영국은 소수의 간판 연구기관과 빅테크 연구소를 축으로 저자 수에서는 한국을 근소하게 앞서며, 양보다 영향력에서 강점을 보인다.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인구가 한국의 10분의 1을 조금 넘는 수준인데도 전략적 집중 투자와 공격적 인재 유치로 1인당 기여도에서 한국을 위협한다.

규모의 중국, 영향력의 미국·영국, 효율의 싱가포르 사이에서 한국이 어떤 색깔로 자리를 잡을지가 향후 5년의 과제다.

'양'만큼 눈여겨봐야 할 것이 '규칙을 누가 쥐느냐'다.

최근 1~2년 사이 한국 연구 생태계가 눈에 띄게 키운 자산이 바로 자체 평가 기준, 곧 벤치마크다.

한국어와 한국 사회의 지식을 평가하는 대표 벤치마크는 45개 분야 533종의 실제 국가시험에서 뽑은 3만5000여 전문가급 문항으로 짜였고, 지난해부터는 오류를 걷어낸 개정판과 전문자격시험 기반 심화판으로 갈래를 넓혔다.

영어 평가지표를 번역해 들여오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시험·사회적 가치·유해성 판별 같은 한국 고유의 과제를 처음부터 설계한 공개 리더보드에는 1700개가 넘는 모델이 올라와 겨뤘다.

평가 기준을 쥔 쪽이 연구의 방향타를 쥔다는 점에서, 벤치마크는 한국이 '규칙 제정자'로 설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이다.

국가 연구거점이 올해 NeurIPS에서 39편을 채택시키고 스포트라이트 발표 4건을 따낸 것도 이런 토대 위에서 나온 성과다.

'모델 빌더'와 '연구 생산국'은 다르다

본지 분석의 첫 번째 결론은 이렇다. 한국의 약점은 '연구를 못 한다'가 아니라 '최상위 연구의 비중이 투자 규모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데 있다. 발표량으로는 세계 5위지만, 학회를 좌우하는 상위 1% 구두·스포트라이트 발표나 분야의 흐름을 바꾸는 의제 설정에서는 중국·미국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 많이 쓰되, 판을 바꾸는 한 방은 드문 구조다.

두 번째, 본지가 투자 지표와 산출 지표를 나란히 놓고 본 결과 자원이 뚜렷하게 '모델 빌더' 쪽으로 쏠려 있었다. 2026년 정부 AI 예산은 10조1000억원으로 1년 새 57.8%나 불어났는데, 이 가운데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구축에 3500억원 안팎, GPU·컴퓨팅 인프라에 2조원 안팎이 배정됐다. 올해 초 시행된 AI 기본법도 거버넌스·R&D·실증을 세 축으로 삼아 산업 육성에 무게를 실었다. 정부가 네이버클라우드·업스테이지·SK텔레콤·NC AI·LG AI연구원 등 정예팀을 추려 독자 모델 개발을 밀어붙이는 사이, 정작 그 모델을 떠받칠 원천·기초연구에 대한 전용 투자는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띈다. 모델은 빠르게 느는데, 다음 세대 모델을 가능케 할 씨앗 연구의 두께는 그 속도를 못 따라간다.

세 번째, 사람이 문제의 핵심이다. 한국의 AI 연구 인력은 세계 8위인 1만8000명 안팎으로 추정되는데, 민간투자(세계 6위, 2024년 약 3조1000억원 추정)와 견주면 머릿수 자체가 얇다. 최상위 연구자의 상당수가 해외 빅테크와 미국 대학에 흡수되는 두뇌 유출 흐름도 여전하다. 모델을 만들 손은 늘렸지만, 새 패러다임을 제안할 머리를 길러 붙잡아 두는 일에는 아직 답을 내지 못한 상태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하나 — 연구 생산국으로 가는 3가지 과제

진단이 분명하면 처방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본지는 세 갈래의 행동을 권고한다.

첫 번째 과제는 평가와 보상의 눈금을 바꾸는 일이다.

지금의 성과 지표는 논문 '편수'에 후하고 '영향력'에는 인색하다.

톱티어 학회의 구두·스포트라이트 발표, 널리 쓰이는 공개 벤치마크의 설계처럼 분야의 규칙을 만드는 기여에 연구비와 승진·정년 심사의 가중치를 실어야 한다.

편수 경쟁에서 의제 설정 경쟁으로 무게중심을 옮기지 않으면 5위의 벽은 깨지지 않는다.

두 번째는 '모델 예산'과 '기초연구 예산'을 분리해 각각의 성과 잣대로 관리하는 일이다.

소버린 AI와 컴퓨팅 인프라 투자는 그 자체로 필요하지만, 그 그늘에서 원천연구가 상대적으로 홀대받지 않도록 별도 트랙과 다년 지원을 보장해야 한다.

단기 상용화 성과에 쫓기지 않고 5년, 10년을 내다보는 위험 감수형 기초연구에 안정적 재원을 묶어 둘 때, 비로소 다음 세대 모델의 설계도가 국내에서 나온다.

세 번째는 국제 공동연구와 공개 벤치마크의 주도권을 선점하는 일이다.

한국이 쌓은 한국어·전문분야 벤치마크 자산을 다국어·다분야로 확장하고, 세계 연구자들이 그 기준 위에서 겨루도록 판을 깔아야 한다.

평가 기준을 수출하는 나라는 자연히 연구 의제의 상류에 선다.

유출되는 두뇌를 막는 것 못지않게, 해외 인재가 한국 거점을 거쳐 가도록 개방형 연구 허브를 설계하는 전략도 함께 가야 한다.

물론 반론도 있다.

당장 산업 경쟁력이 급한 나라가 상용 모델과 인프라에 자원을 몰아주는 것은 합리적 선택이라는 시각이다.

기초연구의 과실은 늦게, 그것도 불확실하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대 없는 응용은 늘 남의 설계도를 빌려 쓰는 데서 멈춘다.

모델 빌더로서의 성취와 연구 생산국으로서의 체급은 함께 키울 때만 지속 가능하다는 것이 본지의 결론이다.

검증 노트

본 기사는 2026년 10월 26일 기준으로 작성됐다.

NeurIPS 2025·ICLR 2025의 투고·채택·채택률과 국가별 저자·채택 비중은 학회 공식 팩트시트와 학회 통계·저자 소속 집계 공개 데이터를 교차 확인했다.

국가별 AI 학회·학술지 논문 순위와 특허·민간투자·연구인력 지표는 스탠퍼드 HAI의 AI 인덱스(연구개발 챕터)를, 국산 벤치마크의 규모와 리더보드 참여 모델 수는 해당 벤치마크·리더보드 논문을 1차 자료로 삼았다.

정부 예산·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정예팀·AI 기본법 시행 내용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발표와 관련 보도를 대조했다.

일부 저자 수·투자액은 집계 기준에 따라 편차가 있어 '안팎'·'추정'으로 표기했다.

기사 verdict: VERIFIED(1차 자료 교차 확인).

편집국